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발도르프 교육기관에 아이를 보내주세요 본문
발도르프 교육기관에 아이를 보내주세요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제가 발도르프 교육을 처음 공부할 때는 10년, 20년 뒤(그러니까 현재) 한국의 모든 교육이 발도르프 교육으로 수렴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조기교육은 존립할 수 없고, 학교 교육과정 역시 아이들의 발달단계에 맞게 섬세하고 예술적으로 개편될 거라 확신했지요. 하지만 제가 순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7세 고시'라는 현상이 대변합니다. 7세 고시는 1학년이 되는 아이들이 초등학교 영어학원에 들어가기 위해 치르는 입학테스트를 의미합니다. 미국 교육과정 기준으로 단어와 문장이 들어가 있는 독해 시험, 어휘, 문법, 에세이 단문 쓰기 그리고 문장 구성하는 것까지 다양한 항목을 평가받은 다음 선생님과 1대 1로 영어 인터뷰를 보게 된다고 합니다. 이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좋은 영어유치원(유아 영어학원)에 들어가야 하고, 또 거기에 들어가려면 4세 고시도 봐야 한다고 하니 기가 찰 일입니다.
영어유치원을 나오고 초등학교 저학년에 영어를 끝내면 초등학교 고학년에 수학을 집중적으로 다룰 수 있으니 수능에 매우 유리하다는 학원 관계자의 설명이 저에게는 비현실적으로 들립니다. 초등 고학년에 중학교 수학을 넘어 고등학교 수학까지 마스터한다면 아이는 의대에 갈 수 있는 걸까요? 좋은 의대에 가고 고소득의 연봉을 받으면 아이는 내내 행복할 수 있을까요? 그전에, 그렇게 조기교육에 시달린 아이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서울 세브란스병원의 소아정신과 의사 천근아 교수는 이러한 7세 고시가 아동학대라고 규정합니다. 지나친 조기교육은 오히려 아이들의 뇌를 망가뜨려 절대 공부를 잘하게 될 수 없다고 하지요. 정서장애에 유사발달장애, 우울증, 청소년 자해 자살, 조현병, 성격장애가 올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7세 고시 열풍은 멈추지 않습니다. 저는 이러한 광기가 사그라들지 않고 더욱 더 불타오르는 이유가 심리적으로는 우리의 불안에 있다고 봅니다. 미래에 대한 부모의 불안이 아이에게 투사되는 거지요. 그러나 더 근본적인 원인은 사회에 있습니다.
어느 작가는 대한민국이 지금 자살하고 있다고 표현합니다. 합계출산율이 0.72명이라는 현실은 그것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사람을 갈아서 굴러가는 나라, 모두가 아프지만 아무도 치료비를 내지 않으려는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이런 나라에서는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도 없고 낳고 싶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마저 귀하게 낳은 우리 아이들이 영유아기부터 입시교육의 컨베이어벨트에 올라타야 한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그만큼 한국사회는 지나치게 경쟁적이고, 기득권질서에 진입하지 않고는 안심할 수 없는 구조입니다. 돈이 없으면 사람 취급 받지 못하고, 돈이 있으면 그 어느 나라보다 편리하고 윤택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든 아이를 들볶아서 기득권질서에 밀어넣어 주거나, 최소한 바닥에 떨어지지는 않게 총력전을 펼치는 것 아닐까요? 이러한 한국의 교육현실을 중앙대 김누리 교수는 파시스트를 양산하는 교육체제라고 부릅니다. 다 같이 행복하게 사는 민주주의자를 키우는 게 아니라 공부를 열심히 시켜서 약자를 혐오하고 권력을 독점하는 극우 파시스트를 키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육의 실패가 아니라 사회의 실패입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정신과 진료를 받은 아동·청소년은 2019년 18만6361명에서 꾸준히 늘어 2023년엔 30만7097명을 기록했습니다. 4년간 환자 수가 64.8% 증가했는데, 증가세는 더욱 가파릅니다. 지역별로 보면 서울 지역, 특히 강남 3구(강남·서초·송파구)에 병원과 환자가 가장 많았습니다. 2024년 상반기 기준 서울에서 아동·청소년을 진료한 정신과 병원은 599곳, 환자 수는 6만6844명이었는데, 이 중 강남 3구에 있는 병원은 215곳(서울 전체의 36%), 환자 수는 2만3374명(35%)으로 집계됐습니다. 대치동과 주변 지역 소아청소년 정신과 병원의 대부분은 최소 두세 달을 기다려야 하고, 주요 대학병원 소아청소년 정신과는 3∼5년을 대기해야 진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아이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이 발도르프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발달에 맞게 영유아 시기에는 학습에 대한 아무런 부담 없이 자유롭게 뛰어놀고 세상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공부는 이갈이를 시작하는 7세에 시작해도 늦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이갈이가 시작되면서 기억력이 강해지고 배움의 욕구도 생깁니다. 아직 흥미와 욕구가 생기지 않은 아이를 붙잡아 억지로 조기교육을 한다고 한들 그것은 아이의 발달에 치명적인 해가 될 뿐입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다른 아이들이 이미 다 한글을 떼고 오니까 선생님도 제대로 안 가르쳐주시지 않냐고 물어보는 부모님들이 있습니다. 안 배우고 온 아이만 소외감 느끼고 뒤처지는 것 아니냐는 불안이 숨어 있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1학년의 교육과정은 한글의 자음, 모음을 차근차근 배울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고, 교과서도 그렇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선생님에게는 사실대로 말하고 원칙대로 가르쳐주시길 부탁드리면 됩니다. 다른 아이들이 이미 배우고 왔다고 하더라도 그런 아이들은 자기가 이미 안다는 착각에 빠져 공부에 별 흥미도, 열의도 없습니다. 조금 위축되더라도 그것은 극복해내야 할 아이의 과제입니다. 아이들은 우리보다 의지가 강합니다. 어려움을 이겨냈을 때 아이의 마음은 더 강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이를 믿고 응원해주면 됩니다. 저도 저희 아이를 그렇게 대해주었고, 아이는 힘차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나 세상을 다시 건강하게 만들어주길 간절히 바랍니다.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지 늘 질문하고,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늘 고려하며 살아가는 성숙한 사람이 되어주길 바랍니다.
AI와 로봇의 발달로 일자리를 잃게 되지는 않을까, 많은 사람이 걱정합니다. 기술의 발달을 막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건 인간을 중심으로 한 민주적 사회 체제입니다. 기술의 발달이 지금의 경제적 불평등을 더욱 강화시킨다면 우리는 정치적 힘을 모아 부조리를 타파해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삶을 위협하지 않도록 기술을 규제할 필요도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노예들을 착취하며 민주주의 정치와 예술적인 문화를 꽃피웠지만 우리는 AI와 로봇에 의해 더 적게 일하고 인간적인 활동을 더 많이 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보다 더 일을 줄이고 편안하게 살 수 있다면 무엇을 하고 싶으신가요? 저는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같이 놀고 음식을 만들어 먹고 여행을 다닐 것 같습니다. 아름다운 음악을 더 많이 듣거나 연주해 보고, 그림도 그리고, 연극도 보러 가고 싶습니다. 텃밭에서 농사를 지어서 주위 사람들과 나누는 일도 좋겠지요. 발도르프 교육은 그렇게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길러주는 교육입니다. 더욱 풍부하고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교육과정이 짜여져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다른 이들의 노동으로 채워집니다. 입고 먹고 마시는 모든 일, 모든 재화가 다 타인의 노동으로 이루어지니 감사한 마음이 드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타인을 위해 일해야 하는 것이고, 우리의 삶은 사회 전체를 염두에 둘 때 이기심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발도르프 교육은 이러한 사회적 삶을 바탕으로 펼쳐집니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 모든 생명, 나아가 우주 전체의 모든 물적 존재와 영적 존재를 고려한 세계관 속에서 자기 자신을 찾아갑니다. 우리가 근시안적인 태도에서 깨어나 삶의 본질에 대해 질문을 던질 때, 진정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탐구하고 실천해 나갈 때 우리는 아이들에게 새로운 교육을 주고자 할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발도르프 교육이라고 믿습니다. 귀하게 낳은 우리의 아이들에게 고통을 줄 게 아니라 진정한 사랑을 주고 싶다면 발도르프 교육기관에 아이를 보내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아이는 건강하고 힘 있게 자라나, 불투명한 미래일지언정 아주 단호하게 자신의 행복을 개척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슈타이너사상연구소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시는 저들에게 권력을 주지 말라 (0) | 2025.04.04 |
---|---|
대한민국과 싱크홀 (0) | 2025.03.28 |
서부지법 폭동과 법치주의의 위기 (0) | 2025.03.09 |
회복적 사고, 혼란의 시대에 올바르게 사고하기 (0) | 2025.03.04 |
대전 초등학생 사망 사건에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0) | 2025.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