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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도르프 교육의 철학적 이해: 카르마의 지평에서 우주-결정론적으로 이해되는 교육 - 강상희 (4) 본문

발도르프교육학/발도르프 교육철학

발도르프 교육의 철학적 이해: 카르마의 지평에서 우주-결정론적으로 이해되는 교육 - 강상희 (4)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3. 1. 12. 11:33

5. 카르마의 지평에서 우주-결정론적으로 이해되는 교육

 


슈타이너의 인지학적 인간 이해의 핵심 개념인 카르마는 초감각적 세계 안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의무와 존재 당위의 성격을 갖고 있다. 인지학적 이해에 따르면 인간은 피안 세계에 있는 특정한 힘들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인간의 정신적 개체성은 미리 형성되어 있다. 슈타이너는 이 세계의 정신적 실체들 및 그것들의 우주적 장소, 옛 달, 옛 지구, 옛 태양 그리고 옛 토성에 관해 말하고 있다(EE, 149-161). 따라서 인간이 태어나기 전부터 인간에 작용하는 초감각적 힘들을 고려하고 장려하는 일이 발도르프 교육의 본질적 부분으로 자리잡고 있다. 슈타이너에 의하면 이것은 "엄청난, 깊은 의미를 지닌, 실천적 결과"(EE, 154)를 낳는다.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삶의 현재 시점에서 힘들의 수태와 관련하여 또는 그가 받은 힘들의 사용과 관련하여 방해받아서는 안 될 정도로 중요하다"(EE, 154).


슈타이너의 인지학적 인간 이해에 따르면 어린이는 "영계에서 파송된"(EE, 157) 존재이며 이미 존재해 있던 정신적 개성 (Personalität)을 구비하고 있는 존재이다. 어린이는 카르마에 따라 결정된 정신적 개별자로서 이 세계에 온다. 이처럼 카르마를 인정하고 들어갈 경우 교육자는 먼저 전제된 발달의 걸음걸이를 뒤따르며 동시에 개인적으로 나타나는 초감각 힘들을 쫓아야 한다. 슈타이너에 의하면 교사가 자신의 교육 이념이나 교안을 제시할 경우 이는 어린이에게 해롭게 작용할 수도 있다. 어린이 안에서 태동하여 발현되는 힘들은, 수태 전이나 수태 후에도 어린이에게 작용하는 힘들이기 때문에 방해받아서는 안 된다. 교육자는 이 힘들을 유의하며 보조해야 하는 이들이다.


이런 배경 위에서 우주에 연원하고 있는 초감각적 힘들의 발달에 따른 교육 단계는 발도르프 교육학에서 절대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각각의 발달 단계에 적용되는 교육적 조치는 원칙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


"교육을 통해서 지력에 끌어올릴 수 있는 것만을 우리는 끌어낼 수 있다. 단 우리는 어린이가 탄생 후에 체험하는 것은 탄생 또는 탄생 전의 현존[전생], 수태 이전에 어린이가 체험하였던 것의 표상이며 결과라는 것을 의식해야 한다"(WS, 25).


또는 "[어린이에게서] 탄생 전에 존재했던 것의 척도에 따라 발달해가려는 속성들이 나아온다"(WS, 26). 여기서 슈타이너의 결정론적 생각이 뚜렷이 부각된다. 교육자는 우주-결정론적 사건 앞에서 무력할 뿐이며, 교사의 과제는 단지 어린이가 태어나기 이전의 삶이 싹트게 하는 일일 뿐이다.


카르마나 초감각적 힘들을 따르는 것으로 교육을 이해할 때 의도되거나 계획된 행위로서의 교육은 성립되지 않는다. 슈타이너가 제시하고 있는 세 유형의 교육자를 살펴보면 이 점은 더욱 분명해진다. 처음 두 유형의 교육자들은 특정한 교육 계획안을 제시한다는 데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첫 유형의 교사가 제시하는 교육 계획안은 자신이 겪은 긍정적인 경험의 강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두 번째 유형의 교사가 제시하는 계획안은 부정적 경험을 예방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슈타이너에 의하면 이 두 유형은 한 가지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볼 때 무용지물이다. 즉, 그들은 필연적으로 그리고 발생론적으로 어린이 안에서 진행되는 감각 및 초감각 과정에 유의하지 않는다. “세 번째 교사는 자연에 따라 진보하는 신적 실체들의 힘들에게서 고무받았다"(EE, 176). 이 힘들은 주어져 있고 교사는 그 힘들에 복종해야 한다. 슈타이너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개념화한다.


“거기서 일어난 일을 손대지 말고 두어라. ... 우리가 필연적인 것을 올바른 방법으로 다룰 때만 비로소 발달의 진행이 가능하다"(EE, 186).


결국 어린이에게 행하는 교육적 조치들은 모두 피안 세계에서 일어난 과정들의 "재현"(EE, 161)에 불과하다. 슈타이너는 지나간 윤회의 형태들을 재생해야 하는 과제를 교육에 부과한다.

 

"즉 나는 상술하는 바인데, 어린이는 마지막 죽음과 현재 탄생 사이에 있는 지나간 삶 속에서 수 세기 전에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일 수 있다. 그리고 그때 몸소 겪은 것은 지금 내가 행하고 있고 꾀하고 있는 것 안으로 흘러 들어온다"(EE, 180-181).


초시대적 시간에서 파생되는, 인간을 결정하는 다양한 초감각적 힘들에 루시퍼(Luzifer)와 아리만(Ahriman; 페르시아의 숙명론의 신, 악의 신)도 들어 있다. 슈타이너는 어린이가 자아로 발달하는 과정에 드러나는 자아의식 이전의 정신적 힘들로서 루시퍼와 아리만의 힘의 영향을 받는 선행 사건이 둘 있다고 본다. 이 사건은 대략 3세 어린이에게 한 번 일어나고 그 다음 대략 9세 어린이에게서 한 번 더 일어난다. 교육자는 이 발달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루시퍼와 아리만과 대항해 싸워야 한다(EE, 137). 슈타이너가 이런 실체들을 극복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으로 제시하는 것은 비논리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슈타이너는 매우 강렬한 성격의 아리만에 대한 성공적인 저항을 금하기도 한다. 이런 특징은 인지학적 인식이론의 배경을 반영하는 것이다.


"가장 난폭한 아리만의 영향력과 싸울 매우 간단한 수단이 또 있겠지만 그것은 인간에게 좋지 않다. 인간이 제 2의 치아를 얻게 되면 인간은 그 치아를 아리만에게 박아 넣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때 아리만의 가장 첨예한 영향력이 있기 때문이다"(EE, 138).


인지학적 이해를 따르면 인간의 자아의식이나 독립성 역시 우리에게 작용하는 초감각적 힘들의 결과이다. 슈타이너는 "루시퍼와 아리만이 우리 안에서 작용함으로써 독립성이 우리 안으로 흘러들어 온다"(EE, 135)라고 말함으로써 이런 생각을 확신시켜 준다. 독립성은 아주 악명 높은 우주적 실체들, 즉 악마의 우두머리인 루시퍼와 페르시아 운명의 신인 아리만의 작용에 의해 생기고 자라난다. 여기서도 인지학적 세계관과의 연관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 이런 이해에서 독립성은 철저히 타자에 의해 촉발되는 것이다. 독립성은 개인의 자유로운 결단이나 또는 교육자와 어린이 사이의 자유로운 교제의 결과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카르마의 실재를 전제할 경우 교육은 어떤 개념으로 이해되는가 하는 물음을 던져 볼 수 있다. 교육은 카르마에 의해 행해지지 않은 것을 촉진하는 것이며 교육자는 현생 이전에 인간을 이미 정신적 인격으로 결정한 초감각적 실체들을 실현하는 조력자이다. 교육은 우주에 근거하고 있는 우주 과정이다. 인간의 현실존이 전생 혹은 초시간적 존재형태의 반영일 뿐이고, 전생에서 일어난 과정의 재현에 지나지 않는다면, 어린이에 대한 목적 지향적인 의도적 행위로서의 교육은 불필요하다. 더 나아가 의도적 교육 시도는 우주 법칙과 모순에 빠져들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옳지도 않다. 우주 법칙에 근거한 발달이 교육이 할 바를 하기 때문에 교육을 위한 위탁은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자라나게 하는 교육이냐 만드는 교육이냐에 관한 교육학적 논쟁에 다시 불을 붙이면 자라나게 하는 교육은 자연 법칙으로서의 발달에 의존하기만 하면 되기에 교육의 무용론을 내포하고 있고, 만드는 교육은 교육의 만능주의를 품고 있다. 슈타이너의 교육 이해는 교육의 무용론 형태라 볼 수 있다. 이는 궁극적으로 카르마에 의해 우주 차원으로 확대된 교육 이해의 문제점이라 볼 수 있다. 발도르프 교육학 안에서 인간 스스로의 의지로 결정되는 몫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발도르프 교육 실천과 교육학은 우주 결정론을 따라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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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도르프 교육학을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좋으나 슈타이너의 생각이 결정론에 기반해 있다는 견해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발도르프 교육에서 바라보는 인간의 카르마는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식물이 자기 안에 발달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인간도 그러하며, 다만 우연적 환경에 따라 그것은 영향을 받을 것이다. 정신적 존재로서 탄생 이전 세계에서 가져오는 카르마의 힘을 인정한다고 해서 교육이 무의미하지는 않다.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계획대로 되지는 않는 게 인간의 삶이지 않나. 교사는 아이의 카르마를 이해함과 동시 정신적 존재들과 협력하여 아이가 가져온 과제를 가능한 잘 풀어갈 수 있도록 섬세하게 교육행위를 해야 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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