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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비폭력 대화를 통한 교육의 질적 향상 본문

회복적 정의+비폭력 대화

비폭력 대화를 통한 교육의 질적 향상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1. 9. 9. 21:05

비폭력 대화를 통한 교육의 질적 향상

 

존 커닝햄

슈타이너사상연구소 김훈태 녹취 및 정리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한국에 오겠다고 계획했을 때 이런 자리가 꼭 주어지길 갈망했습니다. 저는 한국의 발도르프학교와 꼭 연결되고 싶었습니다. 발도르프교육과 인지학을 하는 사람들과 연결되기를 열망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발도르프교육과 1978년부터 인연을 맺었습니다. 처음에는 학부모로서 학교가 시작되는 것을 도왔습니다. 시애틀 북쪽의 작은 섬이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찬장을 만드는 직업을 갖고 있었지만, 발도르프학교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의해 많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때 루돌프 슈타이너의 책들을 읽었습니다. 슈타이너는 저의 오랜 열망을 충족시켜 주었습니다. 그래서 영국 에머슨에서 교사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돌아와 오리건 주에서 발도르프학교 교사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1986년부터 2000년까지 일했습니다. 그러던 중 학교에 사회적 관계문제로 힘든 시기가 찾아왔습니다. 그 매개역할로 제가 비폭력대화 트레이닝을 받았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마셜 로젠버그의 이름을 들었습니다. 1998년에 처음 그를 만났지요. 99년에는 주말 내내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4학년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한 어머님과 함께 만났습니다. 그때 마셜이 어떤 작업을 하는지, 비폭력대화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 진지하게 배우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어머님이 제 후견인이 돼주셨습니다. 비폭력대화 코스의 막바지에 저는 인지학을 통해 살아있음을 느꼈고, 마셜의 작업을 통해서도 살아있음을 느꼈습니다. 이 두 가지의 어울림을 찾고 싶었습니다. 이게 바로 지난 10년간 저의 깊숙한 갈망이었습니다.

 

코스를 마치고 그 어머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스위스의 개별 트레이닝에 가 보시라고요. 15초 정도 생각하고 그리하기로 했습니다. 스위스는 마셜의 휴식 장소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괴테아눔과 30분 정도의 거리에 있지만 마셜은 괴테아눔을 몰랐지요. 몇 명의 동료들과 함께 11일 동안 연수를 다시 받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괴테아눔으로부터 팩스를 받았습니다. 괴테아눔에서 일하는 분이 괴테아눔에도 비폭력대화가 필요하다며 연수를 요청했습니다.

 

비폭력대화 연수 이후에 저의 삶은 바뀌었습니다. 고국으로 돌아가 학교에서 1년을 더 가르쳤습니다. 그 1년 동안 비폭력대화가 바로 제가 하고 싶은 일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학부모님들과 동료 교사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여기에 있으니까 말입니다. 우리는 뭔가의 갈망에 의해 여기 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의 그 갈망에 대해 얘기하고 싶습니다. 영혼의 근원적인 것, 우리는 끝없는 갈망을 갖고 있습니다.

 

그 전에 드릴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이미 저와 함께 작업한 분이(제주도 평화컨퍼런스에서) 이 자리에 계십니다. 그래서 저는 매우 기쁩니다. 왜냐면 이것은 굉장히 상호작용적인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강연을 하고 있지만 사실 여러분과 정말로 즐기고 싶습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경험을 나누고 싶습니다.

 

여러분 중에 발도르프교육이나 인지학에 연결된 분이 계십니까? 그리고 비폭력대화에 연결된 분이 계십니까? 저는 그 둘을 하나의 형태로 일구어내는 게 과제입니다. 왜냐하면 인지학이 비폭력대화를 이해하는 데에 깊은 도움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비폭력대화는 다소간 미카엘적인 요소가 녹아 있습니다. 특히나 사회적인 부분에서 그렇습니다. 저는 그 둘에 대해 얘기하지만 여기 계신 모든 분과 대화하고 싶습니다.

 

 

반사회적인 힘과 사회적인 힘

 

슈타이너는 인간 내면에 녹아 있는 사회적/반사회적인 부분에 대해 강연을 했습니다. 반사회적인 힘과 사회적인 힘을 구분하였지요. 거기에는 도덕적 가치 판단이 없습니다. 좋고 나쁨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반사회성에는 그저 인간으로 존재하고픈 힘이 있습니다. 인간 속에는 이미 반사회적인 요소가 녹아 있습니다. 개별의 존재로서 받아들이는 것은 사람들마다 서로 다 다릅니다. 이 삶을 살고자 제가 쓰는 에너지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에너지입니다. 

 

우리가 알고자 하는 의식의 주된 부분, 그러니까 제가 쓰는 부분은 여러분이 쓰는 것과 다른 것입니다. 그것의 원형적인 모습은 소비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얻고자 한다면 극단적으로 될 수 있습니다. 균형이 필요하지요. 거기에는 또 하나의 힘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발전을 위해 내면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 자체가 하나의 반사회적 힘입니다.

 

우리가 무엇에 대해 더 많이 알려고 다가가면 갈수록 사회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게 됩니다. 여러분이 뭔가에 깊이 집중하고 있을 때 누가 갑자기 어깨를 툭 치면 그 순간 빠져나오기 싫은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앞의 것이 원형적인 것이라면 지금 것은 명상적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기에도 도덕적 잣대는 없습니다. 명상은 주변으로부터 완전히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것도 균형을 잃으면 문제가 됩니다. 맹목적으로 옳은 것, 정의에 대해 집착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내가 옳다, 내 의지로 한다... 등등. 그래서 여러분은 자유의지로 여기에 왔다는 걸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웃음)

 

개별화, 개인화는 반사회적인 힘을 키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의식 진화의 과정에서 개별화의 선상에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자유와 책임감을 발달시켜야 합니다. 슈타이너는 이 과정이 지나치게 가속화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래서 이 과정으로 인해 우리가 서로 간에 마찰, 분쟁 등을 가져왔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회적 부분에서 균형을 잡지 못하면 반사회적인 힘이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회적인 힘은 의식적으로 키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개별적인 노력에 의해서만 이뤄질 수 있습니다.

 

사회적인 힘이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 속으로 빠져들 때, 우리의 의식은 깨어 있는 상태와 잠들어 있는 상태가 있는데, 깨어 있는 동안에는 반사회적인 힘이 작동하고 잠들어 있는 상태에서는 사회적인 힘이 나옵니다. 의식이 잠들어 있는 상태에서는 감각들이 완전히 노출되어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아주 감각적인 상태입니다. 사실 아이들은 줄곧 잠자고 있는 상태지요. 여섯 살 아이가 자기 전 동화를 듣는 건 완전히 감각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모든 감각을 동원해 들으니까요. (입을 벌리며 푹 빠져든 모습을 보이며) 모든 상상력을 동원해서 너무나 자기 감각에 깊이 녹아 있기 때문에 다음날 토씨 하나 안 빼고 다 기억을 하곤 하지요. 아이들은 그런 존재로서 성장합니다. 세상과 하나가 되어서 세상을 모방합니다.

 

9세쯤 되면 아이들에게는 하나의 위기가 닥칩니다. 인식의 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어, 내가 세상과 나를 이렇게 떨어뜨릴 수 있네!’ 이때는 거짓말을 할 수 있습니다. 어른들이 자기 생각을 알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를 개별화합니다. 부모나 교사는 아이들의 개별성을 점점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동시에 반사회적인 힘이 뿜어져 나오는 것도 알 수 있지요. 이러한 경향이 사춘기에 이르면 온통 반사회적인 모습뿐입니다. 모든 것에 자기 의견과 자기 판단이 있습니다. 사고와 인식의 힘이 생기는 순간은 잠자던 의식이 깨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개별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길을 찾고자 노력합니다. 그 순간 우리는 도전이라는 것을 서로 만들어 갑니다. 아이들과의 관계에서도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안의 사회적인 힘을 발전시키도록 요청을 받습니다. 그 사회성을 발달시키는 한 방법은 의도적으로 잠을 자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만날 때 나를 의식적으로 잠재우기 때문에 내 속에서(나를 통해) 상대방의 생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슈타이너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두 사람이 만나 대화할 때는 항상 어느 누군가가 상대방을 잠들게 합니다. 하지만 상대방은 깨어 있으려고 하지요. 대화란 한 명은 깨어 있고 다른 한 명은 잠자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둘 다 깨어 있다면 힘들어지겠지요. 따라서 두 사람은 깨어 있는 상태와 잠자는 상태를 번갈아 해야 합니다.”

 

『자유의 철학』 부록을 보면 사람들이 서로가 만나서 잠자는 상태로 들어가는 순간 다른 사람 속의 다름을 겪으며 충격을 받는다고 합니다. 다시 자기를 열고 다시 닫고 다시 열고... 우리가 의식할 수 없는 아주 빠른 속도로 그렇게 합니다.

 

만남이란 사회성과 반사회성이 만나고 교차하는 일입니다. 12감각 중 가장 높은 자아감각은 다른 존재의 존재성을 인지하는 것입니다. 사회적 현상의 원형적인 모습이 바로 이 ‘자아감각’에 해당합니다. 자아감각은 사회적으로 잠자는 상태를 말하지요. 저는 그걸 ‘공감(empathy)’이라고 부릅니다. 보는 것은 감각적 활동인 동시에 인식적 활동인 것입니다.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 보기

 

위의 그림을 보면서 여러분은 ‘도대체 내가 뭘 봐야 하는 거야? 도대체 저게 무슨 의미야?’ 이러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바로 여러분의 갈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슷한 일이 갈릴레오에게도 일어났습니다. 그가 렌즈를 갈아 첫 망원경을 만들었을 때, 그때는 아이들 같이 사람들이 망원경으로 뭘 자꾸 보려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많은 자연과학자들이 달을 관찰하기 위해 망원경을 만들었습니다. 갈릴레오는 달을 관찰하며 어느 순간 “저건 산이고 저건 계곡인데”라고 말했습니다. 머릿속에서 빛의 스위치가 반짝하고 켜지는 순간 사람은 이미 자기 생각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이 그림에서 빛의 스위치가 켜지는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그림은 기린의 머리를 그린 것입니다. 그 뒤에는 이 그림을 별로 보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뭔가 말이 되게 만들고 싶은 열망, 의지의 힘이 우리 내면에 있는 것입니다.

 

뭔가 ‘안 될 것 같아’라고 여기는 그 순간 등을 돌릴 때, 이 그림의 의미를 찾기 전까지 불편한 감정이 생깁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갈망입니다. 욕구에 대한 의지의 힘, 우리는 끝없는 갈망이 있습니다. 만족 또는 채워짐을 위해서 우리는 노력합니다. 그게 불가능하다고 느낄 때와 달리 할 수 있다고 느낄 때, 마침내 보게 됐을 때는 안도감이 생깁니다. 그 지점이 바로 비폭력대화입니다.

 

인류는 필요 또는 욕구가 있습니다. 우리 영혼 속에 끝없이 일어나는 욕구가 있습니다. 갈망이 성취되거나 혹은 되지 않을 때 그에 대한 감정이 있습니다. 혹시 이 그림의 기린을 보기 전과 본 후에 달라진 게 있습니까? 변한 것은 여러분이 그림을 보는 방식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전에 기린을 본 적이 없다면 그림 속 기린은 결코 찾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을 찾고 체계화한다는 것은 의미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뭔가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꿀 때 우리는 보여지는 무언가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인지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슈타이너는 여기에 개념을 부여했습니다. 예를 들면, 에테르체라는 것이 있습니다. 에테르체는 인간을 보는 다른 방식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점차 보이지 않던 것이 보려는 과정을 통해 보이는 것입니다. 비폭력대화의 과정도 이와 같습니다.

 

 

폭력과 비폭력의 의미

 

인류는 모두가 되어가는(성장하는) 존재입니다. 우리 자체가 삶입니다. 우리의 언어는 되어가는 우리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언어는 우리에게 기계적 수단을 제공할 뿐입니다. 어려운 건 우리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고군분투하는 마음, 살아가는 인생은 눈에 보이지 않고, 그 대신 ‘너는 이렇고, 너는 이래’라는 건 있습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서로를 대상화하는 게 있습니다. 그게 바로 폭력입니다. 우리 스스로 노력하는 모습이 눈으로 보여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폭력적으로 됩니다.

 

사실 우리는 어느 정도 옳은 일에 에너지를 투여합니다. 또 물어보지도 않고 서로를 교화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언어에는 이미 반사회적인 요소가 녹아 있습니다. 우리 몸속에 체화된 모국어와 같습니다. 우리가 상대방을 비난할 때, 결함을 발견할 때, 분석하거나 진단하고 추측할 때, 딱지를 붙여줄 때(예를 들어, “당신 담즙질이네”와 같은) 말입니다. 조그만 딱지를 붙여주는 게 유용할 수도 있습니다. 많은 관찰을 하고 난 다음이라면요. 우리는 최대한 잘하려고 노력합니다.

 

제안을 하나 하고 싶습니다. 뭔가를 볼 때 항상 새로운 방식으로 보려고 노력했으면 합니다. 되고자 하는 존재를 뭐라고 이름 지을 수 있을까요? 마셜의 뛰어난 재능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우리가 전우주적 존재로서 인류는 서로가 서로에게 갈망하는 게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도 뭔가를 갈망하기에 여기에 오셨을 겁니다. 관계를 풀고 싶다거나 삶의 의미를 찾고 싶다거나 능력을 키우고 통찰력을 얻고 싶어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공유하는 필요 또는 욕구입니다. 우리 모두는 안정에 대한 욕구 때문에 공유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한 학교, 공동체의 기반을 마련해 주는 것입니다.

 

학기 초에 이렇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당신은 뭐가 필요해요? 어떤 도움이 필요합니까?” 이런 질문은 상대방에게 안도감을 줄 수 있습니다. 공통의 안정감, 의미를 연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의미, 안정감, 일체감 등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놀고 싶고 알고자 하는 갈망이 보편적으로 있습니다. 또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갈망도 있습니다. 서로의 삶을 지지해 줄 수 있는, 헌신할 수 있는, 각자에게 좋은 것을 가져다 주고 싶은 갈망입니다. 진정한 우리 내면의 자유로써 말입니다.

 

 

쟈칼의 마음과 기린의 마음

 

‘필요/욕구’라는 단어는 만남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비판하고 비난하고 평가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불행, 비극의 조각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다면 남이 뭐라 하든 그의 안에 있는 갈망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마음껏 비난할 수 있는 상황으로 초대하고 싶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한 명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리고 뭐든지 떠올려 보십시오. 비판, 비난, 평가... (기린 손인형과 쟈칼 손인형을 꺼내면서) 자칼은 비판과 비난 등 부정적인 것들을 대변합니다. 기린은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것을 대변합니다.

 

누군가를 쟈칼로 여기는 그 생각이 바로 쟈칼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쟈칼 인형 속에 작은 기린 인형(손가락인형)을 넣고 합니다. 쟈칼의 속마음에는 늘 이해받고 싶어 하는 기린이 숨어 있는 법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껴안고 싶어합니다. 이해하고 싶고 안전하고 싶지요. 쟈칼은 개과 동물로 명백한 위계 서열이 있습니다. 위에서부터 계속 지배하는 관계, 즉 수직적 체계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쟈칼이 좋은 비유가 되는 이유입니다. 비극적이게도 쟈칼의 모든 말은, 숨어 있는 기린의 만족되지 못한 욕구 때문에 나옵니다. 또는 언어 능력이 떨어져서 그렇기도 합니다. 그래서 쟈칼한테 어떤 말을 듣든 우리는 속의 기린을 봐야 합니다.

 

기린은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보는 존재입니다. 가장 큰 키의 땅짐승이고 되새김질을 하는 동물이지요. 사바나 초원에서 가시 박힌 잎들을 계속 씹습니다. 가시가 있는 건 알지만 오랫동안 씹어 삼켜서 생명을 만듭니다. 일종의 도덕적 호흡과 같습니다. 인간은 생명을 마시고 죽음을 내뱉습니다. 그래서 저는 식물에게 감사합니다. 식물은 죽음을 마시고 생명을 내뱉기 때문입니다. 슈타이너가 말하길 인간이 나중에는 아마 죽음을 마시고 생명을 내뱉을 거라고 합니다. 티벳 불교의 승려들이 하는 명상 호흡처럼요.

 

쟈칼을 들이삼키고 생명, 사랑, 관계를 내뱉습니다. 자원자가 나와서 저에게 비판적인 얘기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문제될 건 전혀 없습니다. 자원자가 나올 때까지 모두가 긴장되는 걸 느끼실 것입니다. 누군가 나오자마자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겠지요. 이럴 때는 모든 사람에게 아주 쉽게 선물을 줄 수 있습니다. 그저 손만 들면 됩니다. (웃음) 그게 바로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자유로울 수 있다면, 의무감이나 압박감이 있을 때 그냥 거기서 재미를 느끼면 어떨까요?

 

 

(한 분이 악역을 맡으셨다)

“왜 선생님은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세요?”

 

이 분의 말씀을 바꿔보면 “자칼처럼 보지 마세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럴 때 크게 네 가지의 대응법이 있습니다. 1) “저는 원래 이래요. 익숙해지세요!” 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아우, 내가 왜 그랬지? 죄송해요. 제 잘못이에요. (하지만 제 생각엔 약간 과도한 반응이신 것 같아요)” 이럴 수도 있지요. 1)과 2)는 비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나도 내 눈에 대해 이해받고 싶었는데. 저도 눈이 이래서...’ 이렇게 자기 욕구와 연결할 수도 있고, 4) “제가 바라보는 모습에 불편하셨군요. 제가 어떻게 해야 도울 수 있을까요?” 이처럼 상대방과 연결하기 위해 노력할 수도 있습니다. 비폭력대화는 이렇게 자기와 상대방의 감정을 느끼고 그 안의 욕구를 바라보는 노력을 하는 방법입니다.

 

아쉽게도 시간이 다 되었네요. 오늘 제가 비폭력대화와 인지학에 대해 여러분께 말씀드릴 수 있게 도와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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