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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알속 - 틱낫한 스님의 반야심경 해설 (3) 본문
깨달음의 알속
- 틱낫한 스님의 반야심경 해설
슈타이너사상연구소 김훈태 옮김
무엇이 비어 있는가?
“보디사트바이신 아발로키타께서 깊은 프라즈나파라미타를 행할 때, 다섯 스칸다를 밝게 비추어 보시고 그것들이 똑같이 비어 있음을 깨달으셨느니라.”
‘보디bodhi’는 ‘깨달음’을 뜻하고, ‘사트바sattva’는 ‘중생衆生’을 뜻합니다. 그래서 ‘보디사트바(bodhisattva:보리살타, 보살)’의 뜻은 ‘깨달은 중생’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따금 보살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아발로키타는 이 경전에 나오는 보살의 이름입니다. 아발로키테쉬바라를 줄여 아발로키타라고 부릅니다. 반야심경은 아발로키타 보살이 우리에게 주는 놀라운 선물입니다. 중국과 베트남, 한국, 그리고 일본에서는 그를 콴인, 쿠안암, 관음觀音, 또는 카논이라고 부르며, 그 뜻은 “도움의 손길을 바라는 세상의 울음소리를 (자유자재로) 듣는 이”입니다.
동양에서는 많은 불교도들이 그에게 기도를 드리거나 그의 이름을 외웁니다. 아발로키타 보살은 두려움을 스스로 극복하였기에, 우리에게 ‘두려움 없음(non-fear:무외無畏)’이라는 선물을 주었습니다. (이따금 아발로키타는 남성이기도 하고 여성이기도 합니다.)
프라즈나파라미타(prajnaparamita:반야바라밀다)란 곧 완벽한 깨달음입니다. 반야를 흔히 ‘지혜’라는 말로 옮기지만, 저는 지혜가 반야의 뜻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깨달음은 강줄기를 따라 흐르는 물과 같습니다. 지혜나 지식처럼 딱딱한 말은 도리어 우리의 깨달음을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지식이 오히려 깨달음에 장애가 된다고 여깁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진리라 규정해 버리고 그것에 지나치게 집착한다면, 진짜 진리가 우리의 방문 앞에 다가와 문을 두드려도 우리는 그를 안으로 들이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기 위해선 먼저 우리의 선입견을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섯째 칸에 오른 뒤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고 여긴다면 여섯째 칸으로 발을 디딜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견해를 극복할 줄 알아야 합니다. 깨달음은 물과 같아서 흐를 수 있고, 또 꿰뚫을 수도 있습니다. 견해, 지식, 지혜 따위는 고형적固形的이어서 깨달음의 길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발로키타에 따르면 이 종이는 비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분석에 의하면 그것은 모든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과 그의 통찰이 서로를 부정하는 듯합니다. 아발로키타는 다섯 스칸다(five skandhas : 오온五蘊)가 모두 비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비어 있다는 걸까요? 열쇳말은 ‘비어 있다’입니다. ‘비어 있다’는 ‘어떤 것이 비어 있다’입니다. 제가 물이 든 컵을 들고, “이 컵은 비어 있나요?” 하고 묻는다면 당신은 “아니요, 물이 가득 차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물을 쏟아 버리고 다시 묻는다면 당신은 “예, 비어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비어 있나요? 비어 있음은 어떤 것이 비어 있음을 뜻합니다. 컵은 완벽하게 비어 있을 수 없습니다. 무엇이 비어 있는지를 당신이 알지 못한다면 ‘비어 있다’는 온전한 말이 아닙니다. 제 컵은 물이 비어 있긴 하지만 공기가 비어 있는 건 아닙니다. ‘비어 있다’는 곧 ‘어떤 것이 비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사실상 새로운 발견입니다. 오온이 똑같이 비어 있다고 아발로키타가 말할 때, 그 뜻을 분명히 하기 위해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아발로키타 선생님, 도대체 뭐가 비어 있다는 겁니까?”
오온은 다섯 더미, 또는 다섯 집합 등으로 옮길 수 있습니다. 인간 존재를 이루는 다섯 가지 요소입니다. 그러한 다섯 요소는 우리 안의 모든 것에 강처럼 흐릅니다. 사실 그것들은 우리 안에서 더불어 흐르는 다섯 개의 강입니다. 우리의 몸을 뜻하는 색色(form)의 강, 수受(feeling)의 강, 상想(perception)의 강, 행行(mental formation)의 강, 그리고 식識(consciousness)의 강입니다. 이들은 언제나 우리 안에서 흐르고 있습니다. 아발로키타에 따르면, 그가 다섯 강의 본바탕을 깊이 들여다보았을 때 문득 다섯 모두가 비어 있음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이 비어 있는 겁니까?” 하고 물으면 그는 꼭 대답해줘야 합니다.
대답은 이렇습니다. “개별적個別的인 속성이 비어 있는 것이다.” 그 뜻은 다섯 강이 각자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각각의 강은 다른 넷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강들은 함께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모든 것과 더불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을 보면, 우리에겐 폐와 심장, 신장, 위장, 그리고 혈액이 있습니다. 이 중에서 외따로 존재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다른 것들과 함께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의 폐와 혈액은 서로 다른 두 기관이지만 개별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폐는 공기를 들이마셔 혈액에 산소를 풍부하게 하고, 혈액은 폐에 영양분을 공급해 줍니다. 혈액 없이 폐는 살 수 없고, 폐 없이 혈액은 깨끗해질 수 없습니다. 폐와 혈액은 더불어 있는 것입니다 신장과 혈액, 신장과 위장, 폐와 심장, 혈액과 심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종이가 비어 있다고 아발로키타가 말할 때, 그 뜻은 개별적이고 독립된 실재가 비어 있다는 것입니다. 종이는 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종이는 햇빛과 구름과 숲과 벌목꾼과 우리 마음, 그리고 다른 모든 것과 더불어 있으며, 개별적인 속성이 비어 있습니다. 그러나 개별적인 속성이 비어 있다는 것은 또한 모든 것으로 가득 차 있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살펴 알게 된 것과 아발로키타의 깨달음은 서로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아발로키타는 색수상행식의 오온을 깊이 들여다본 뒤, 그 모든 것이 자기 홀로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각각의 것은 오직 다른 것들과 더불어 있을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는 “꼴(form)이 곧 비어 있음이다(色卽是空)”라고 말한 것입니다. 꼴은 개별적인 속성이 비어 있지만 또한 우주만물로 가득 차 있기도 합니다. 수상행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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