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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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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도르프학교에서 추구하는 인간상 (4)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2. 8. 26. 10:30

발도르프학교에서 추구하는 인간상 (4)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슈타이너는 말년에 ‘그리스도’에 대한 탐구에 집중합니다. 그러한 작업 중 하나가 그리스도상입니다. ‘인류의 대표자’라는 제목의 나무로 깎은 커다란 조각상입니다. 괴테아눔 한 쪽 공간에 전시가 되어 있습니다.  목조건물인 제1차 괴테아눔이 소실되고 콘크리트 건물로 제2차 괴테아눔을 만들었는데, 1차 괴테아눔이 완공되기 전까지 조각상은 완성이 덜 되어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때 완성되어 예정대로 무대 한가운데 뒤에 배치되었더라면 지금까지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작품은 슈타이너와 예술가들이 함께 만든 것입니다. 가운데가 예수 그리스도 상입니다. 한 손을 위로, 다른 손은 아래로 하면서 균형을 맞추고 있는데요. 왼쪽 위에는 어떤 존재가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고 다른 쪽은 땅 아래에서 위를 바라보는 형상이 있습니다. 인지학에서 많이 회자되는 루시퍼와 아리만입니다.

 

인류의 대표자 ‘예수 그리스도’는 루시퍼와 아리만이라는 양쪽의 극단에서 균형을 맞추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이 교사를 본받아야 한다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악의 두 속성. 아리만과 루시퍼

 

아리만: 극단적인 한 모습으로 대단히 경직된 모습입니다. 아리만은 땅 속에 들어갑니다. 우리에게 계속 도그마적으로 자극을 줍니다. 이렇게 해야 해. 이게 맞아. 이 규칙을 지켜야 해. 부자가 되어야 해. 돈을 많이 모아. 낭비하지마. 이런 게 우리의 신체적인 영향으로는 몸이 경직되는 병들이 아리만적인 속성이라고도 말하고, 사회전체가 배금주의, 준법만 강조하는 사회적 경향도 아리만적인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루시퍼: 인간을 교만하게 하는 악의 특성입니다. 너도 대단해, 너도 신이 될 수 있어, 너는 우월해와 같은 경향성입니다. 땅에 두 발을 딛지 못하게 하고 이상만 추구하게 하는 경향이기도 합니다. 구름 위에 떠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자존심이 대단히 강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우월감에 빠져 있는 사람, 자기만 옳다고 고집을 부리는 사람, '내가 아니면 안 돼' 이런 생각도 루시퍼적인 특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안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을 것인가, 우리가 추구하는 인간상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양극성은 항상 우리 삶에 가까이 있습니다. 아리만이 인색한, 구두쇠라면 루시퍼는 낭비가 심한, 호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인색한 사람은 항상 인색하고 낭비가 심한 사람은 항상 낭비하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존재는 자유로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식당에 가면 늘 지갑을 닫거나, 늘 지갑을 엽니다. 극단화된 고정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인간상은 ‘자유로움’입니다.

 

필요에 따라서 검소하기도 하고 관대하기도 한, 대체로 아껴 쓰지만 필요한 경우 사람들을 위해 넉넉히 베풀기도 하는, 검소하면서도 관대한 특성이 오가는 것입니다. 고정되어 있지 않고 중도에서 검소함과 관대함을 오가는 것이죠.

 

요즘 많이 알려진 긍정훈육법의 교사상은 친절하면서도 단호한 교사입니다. 사실 이것은 모순적입니다. 너무 친절하면 비굴해질 수 있고 너무 단호하면 무서워집니다. 부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친절하면서도 단호한 부모를 추구해야겠죠. 양 극단에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양 특성의 균형을 잡으며 움직이는 것입니다. 모순되어 보이고 역설적이지만  그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자유로움’입니다.

 

비겁과 만용 사이의 균형은 신중하지만 용감하기도 한 모습입니다. 옹졸함과 조심성 없는 특성 사이에서 균형은 단정하면서도 동량이 넓은 것입니다. 독단적이거나 무관심한 게 아니라 신념이 강하면서도 너그러운 게 자유로운 모습입니다. 물론 어려운 일입니다.

 

아이들에게 우리가 좋은 부모라는 것은, 양극성을 경계하여 중심을 잡고 잘 사용하는 것입니다. 선이라는 것은 악의 반대가 아닙니다. 악의 반대는 또다른 악입니다. 아리만의 반대가 루시퍼이고, ‘선’은 그 사이에서 조화와 균형 잡고 있는 것입니다. 

 

건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병은 한쪽의 극단성에 빠진 것입니다. 갑상선 항진증이나 저하증도 그렇지만 열병과 저체온증도 극단적인 증상입니다. 어떻게 균형을 잡을 것인가? 거기서 자유로움이 생깁니다. 인지학에서 추구하는 자유로움은 이러한 성숙한 인간상입니다. 우리 아이들도 그런 어른이 되도록 하는 것을 교육적 목표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극단성에서 끊임없이 벗어나서 균형점을 찾아 나가는 것, 갈등 해결 역시 그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열려 있어야 합니다. 성장하려는 태도를 갖추어야 합니다. 내가 옳다, 나만 옳다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경직되기 쉬워지죠.

 

우리는 호감과 반감이라는 양극적인 힘을 영혼에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을 향해 좋아하고 같은 편이 되고 싶은 힘이 있는가 하면 밀쳐내고 싫어하는 힘도 있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는 끊임없이 호감과 반감이 오고 갑니다.

 

진정한 사랑을 하려면 약간의 거리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보통 모르는 남들에게 상처주기보다 정말 가까운 가족에게 상처줄 때가 많습니다. 남들에게는 사회적으로 조심하지만 가족에게는 남들에게 할 수 없는 잔인한 말, 사려 없는 이야기를 할 때가 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그것은 거리감이 없어서이기 때문이므로 적절한 거리감, 공감이 필요합니다. 

 

반감에서 반사회적인 힘이 나오는데 이 힘은 극단화되면 악에 가까워지지만 속성 자체는 ‘나를 주장하는 힘’입니다. 반사회적이라는 것은 나 지향적인, 자아 지향적인 힘입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이것을 추구할게요.” 이러한 것은 반사회적인 힘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 자체로 비도덕적인 것이 아닙니다. 

 

호감에서 사회적인 힘이 나옵니다. 좋아하고 같은 편이 되고 싶고 하나가 되고 싶은 경향성입니다. ‘좋게 좋게’ 관계를 맺으려는 마음도 사회적인 힘입니다. 필요한 힘이긴 한데 이것도 극단화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공동체를 꾸리려면 두 가지 힘이 모두 필요합니다. 물론 사회적 힘이 더 많이 필요하겠지만 어떨 때는 반감을 통해 의견을 내는 것도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숙하게 공감을 가지고 균형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한쪽으로 치우질 때 일이 생기는 듯합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는 자유로운 인간, 조화로운 인간, 균형잡힌 인간이 될 것인가. 이것 역시 아이들에게 바라는 모습이면서도 우리 자신이 추구해야할 중요한 지향점입니다. 

 

반감-호감 넘어서는 추구가 ‘공감 empathy’

 

인지학 책 대부분이 안타깝게도 호감을 공감으로 번역했는데, 공감은 empathy입니다. 슈타이너 당대에는 없었던 말이죠. 20세기 초중반에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우리가 추구해야할 것은 공감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당연히 호감을 가져야겠지만, 우리가 아이들에 대해 지나치게 호감으로만 대한다면 무조건 감싸고 도는 모습을 가질 수 있습니다. 호감과 반감을 넘어서는 공감은 어느 정도의 적절한 거리를 갖되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힘으로, 진정한 사랑의 상태입니다.

 

공감의 힘을 얼마나 개발하느냐에 따라 공동체가 성숙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도 어릴적부터 공감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거리는 유지하되, 그 사람이 되어 보는 것,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고 느껴보는 것입니다. 상당히 어려운 일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일상 속에서 대화를 하며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가정과 학교에서 공감적인 문화가 형성되어 있어야겠죠. 갈등을 조정할 때도 ‘공감하기’는 대단히 필요한 능력입니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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