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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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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학

삶에서 동력 찾기 (3) - 미하엘 데부스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8. 10. 31. 11:36

자유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까?


저녁이 되어 하루를 돌아보며 '오늘은 무엇을 했을까?' 하고 일정표를 들여다본다. 수많은 약속이 빼곡히 채워져 있다. 일정표는 자신에게 무엇을 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약속에 의한 삶은 외부(타인, 규칙 등)에 의해 사는 삶이다. 자유로운 삶을 산다는 것은 외부에 의한 것이 아닌, 스스로 결정한 일들을 통해 내가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내가 하는 결정은 나를 강하게 하고, 내가 하지 않은 결정은 나를 약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결정을 할 때는 신중하게 하라. 이것에 따라 내가 강하거나 약하게 되기 때문이다. '결정(선택)'을 통해 현재의 상태에서 벗어나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중해야 한다. 어떠한 결정을 할 때 실행할 결정이 아니라면 하지 말라.


(* 그리고 타인의 요구에 떠밀려서 하는 결정은 좋지 않다. 책임감은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결정할 때 생긴다. 또한 화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결정하지 말라. 특정한 감정에 사로잡혀 내린 결정은 곧잘 후회를 부른다. - 편집자)



나는 일주일 동안 이것을 해낼 거야. + 이것을 해냈어. -> 자유인


나는 이것을 일주일 더 해낼 거야. + 이것을 해냈어. -> 훌륭한 자유인


나는 이것을 이주일 더 해낼 거야. + 이것을 해냈어. -> 더 강하고 더 훌륭한 자유인



스트레스와 소진에 대항하는 치료법은 바로 자기교육과 실천에 있는 것이다.


의지의 힘은 이렇게 해서 키워지는 것이다. 내가 실행할 수 있는 모든 결정이 나의 의지를 강하게 한다. 일정표의 약속을 지켰다고 해서 의지가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좋은 약속을 정확하게 지키는 것, 내가 선택한 약속을 지키는 실천을 통해 의지가 강해지는 것이다.


의지 안에는 두 가지 영역이 있다. 1) 하고자 하는 것(, 내부통제)과 2) 해야 하는 것(, 외부통제)이 있다. 삶에서 '해야 하는 것'만 있다면 그 삶은 어떻게 될까? 내가 발전시키고자 하는 것은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고, 내가 해야 하는 것은 스트레스가 된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할 때 의지가 강해지는 것이다.



Q: 그렇다면 사람이 신앙을 가지고 신에게 의지하는 것과 자기 안의 의지를 강하게 키워 자신에게 의지하는 것 중 어느 것이 올바르다고 할 수 있나?


A: 신에게 의지하는 것은 잘못된 방법이 아니다. 그러나 내면의 상태에 따라 신에게 의지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아닌지가 달라질 수 있다. 신에게 의지하면서 스스로 져야 할 자신의 책임까지 신에게 의탁한다면 이것은 결코 옳은 방법이 아니다. 신에게 기도를 한다면,


"사랑하는 신이시여! 저는 약한 존재입니다. 저는 되도록 잘 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합니다. 저의 의지를 다 모아 노력합니다만약 제 의지가 충분하지 않다면 제 의지가 강해질 수 있도록 당신께서 힘을 보태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들이 빚을 졌다고 하자. 만약 당신이 능력이 되어 아들이 진 빚 정도를 갚아 주는 것이 어렵지 않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학위 수여를 앞둔 아들은 이 빚으로 인해 공부를 계속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물론 한국 사람에게는 이 질문에 대한 옳은 답을 찾는 것이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된다. 한국은 공부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나라이지 않나.

 

만약 아들이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부모가 한 번에 이 빚을 다 갚아 준다면 미래에는 어떤 결과가 오게 될까? 아들은 아마도 공부를 계속하게 되어 학위를 마칠 것이다. 그러나 학위가 끝나고 난 뒤 그 아들은 또 빚을 지게 될 것이다. 똑똑한 아들은 그때의 경험으로 부모를 압박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또 스스로 책임지지 못할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독일에서는 한국과 달리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다르다. 아마도 빚을 진 아들에게 돈을 벌 수 있도록 아르바이트를 권고할 것이다. 아직은 학위를 마치지 않은 시기이기 때문에 진정으로 공부를 하길 원한다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질 수 있도록 부모는 도울 것이다. 물론 부모가 전혀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 빚을 다 갚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빚이 만약 삼천만원 정도라면 일정 기간 동안 아들에게 천만원 정도 자신이 벌어 책임질 수 있도록 돕고, 아들이 그 책임을 다 해낼 때 나머지 이천만원을 부모가 돕게 되는 것이다. 학위는 그 이후에 마쳐도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은 바로 이 부모와 같은 존재이다. 신은 우리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가 반 정도의 책임을 스스로 다 하길 바란다. 그러면 신은 그 나머지 부분을 도와줄 뜻을 갖게 되는 것이다. 신에게 의지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누가 내 집의 주인인가?


내가 이 집의 주인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주인인가? 본능(배고픔, 갈증...)이 내 집의 주인인가? 내 집의 주인은 누구인가? 본능을 배제하라는 말이 아니다. 내가 언제 무엇을 먹을지를 스스로 결정하라는 것이다.


자기 집에 사고(생각), 감정(느낌), 의지가 살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당신은 생각을 통제할 수 있는가? 있다면 3분 동안 자기 앞에 놓인 컵만을 생각해 보라. 3분 동안 컵만을 생각하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일 것이다. 느낌을 통제할 수 있는가? 느낌은 사람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다. 생각과 느낌에 지배당할 것이 아니라 나의 의지로 생각과 느낌을 조절하여 평정심을 가지는 것이다.


음식과 나 사이에 젓가락이 놓여 있다. 나는 그 젓가락을 통해 예술적으로 음식을 대한다. 젓가락은 추상성을 띤 매개체이다. 도구를 사용하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동물과 다른 차이점이 바로 이 점이다. 본능과 나 사이의 조절을 가능하게 하는 도구, 즉 의지로 나를 조절하고 통제하여 욕구를 충족하는 것이다.



사고와 감정 사이의 긍정성에 주목하라. 일상에서 매순간마다 한 번은 긍정적인 것을 보라.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자동차가 고장을 일으켜 약속 장소에 예정과는 달리 갈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하지만 약속시간을 다시 잡고 나는 자동차를 수리점에 맡긴 후 전철을 타고 약속 장소로 향한다. 그 도중에 나는 전철 안에서 무엇을 보거나 어떤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이 일을 통해 어떤 좋은 일이 생길지를 상상해 보라. 자동차가 고장난 상황이 그렇게 절망적이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무엇이 긍정성일까? 긍정성과 나와의 관계는?

 

의지와 감정을 통합해서 편견 없이, 선입견 없이 상황을 맞아들이는 것, 이것이 긍정성이다. 지금 다른 결정을 내리지 않아도 된다. 자동차 사고처럼 다른 가능성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을 열어두어야 한다. 선입견이 없는 자세, 이것이 긍정적인 자세, 좋은 자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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