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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적 정의+비폭력 대화/갈등전환매뉴얼 : 회복적 정의

정의로 가는 길: 응보인가, 회복인가? - 하워드 제어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3. 5. 8. 01:57

정의로 가는 길: 응보인가, 회복인가?

 

하워드 제어
김훈태 옮김

 
 
날마다 신문을 집어들 때마다 나는 폭행, 가정폭력, 정치적 뇌물, 기업 사기, 조직범죄 같은 범죄에 관한 기사를 읽는다. 당연히, 일부에서 ‘범죄의 급증(crime wave)’이라고 부르는 가운데, 이 문제에 대처하는 최선책에 대한 제안들이 사회적, 정치적 논쟁의 주제가 되고 있다.
 
이러한 논쟁에서 비극적인 것은 제안되는 해결책이 단순히 더 큰 위협 및 더 많은 처벌과 다르지 않다는 데 있다. 정부 안팎에서, 처벌이 우리의 주요 관심사여야 하는지에 대해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거의 없다. 피해자와 그들의 욕구가 무엇인지에 대해 진정으로 고민하는 사람은 더욱 적다.
 
한편, 감옥은 넘쳐나고, 사형제는 복수심과 함께 부활했으며, 우리 납세자가 부담하는 ‘형사사법 체계’의 비용은 계속 치솟고 있다.
 
범죄에 대한 잘못된 규정
 
현재의 형사사법 체계가 피해자를 외면하고 가해자에 대한 처벌 강화에 치중하고 있다는 사실은 체계의 문제점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다. 이 두 가지 문제는 무엇이 범죄를 구성하고 정의가 무엇을 수반하는지에 대한 부적절한 규정에서 비롯된다.
 
법적으로 범죄의 본질은 사람에게 가한 실제 피해보다 법을 위반(violation, 침해)한 데 있다. 공식적인 피해자는 개인이 아닌 국가다. 따라서 피해자와 피해자의 욕구가 너무나 자주 잊혀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피해자는 그 상황의 일부도 아니고, 범죄를 규정하는 데 속하지도 않는다!
 
범죄가 발생하면 피해자인 국가는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하고, 그 결정 과정은 주로 두 가지 질문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유죄인가? 그렇다면 그는 어느 정도의 처벌을 받아야 하는가?” 범죄와 정의에 대한 우리 사회의 규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범죄는 국가의 법률을 위반한 행위다.
정의는 책임을 묻고...
고통을 가하며...
가해자와 국가 간의 다툼을 통해 이루어진다.
 
범죄를 바라보는 이러한 방식은 ‘응보적 정의’라고 불릴 수 있다. 이 방식은 피해자를 위한 자리가 거의 없으며, 일부 학자들이 ‘전투 모델’이라고 부르는 방식을 사용하여 문제를 해결한다. 비난을 확정하는 데 너무 치중하기 때문에 미래보다는 주로 과거를 바라보고, 일반적으로 징역형의 형태로 나타나는 처벌이나 고통이 정상적인 결과라고 가정한다.
 
성경적 대안: 회복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범죄에 대한 규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성경은 몇 가지 제안을 한다. 첫째, 성경은 범죄를 깨어진 관계로 규정한다. 사람들이 물질적, 사회적, 정신적으로 서로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갈 때, 그들은 샬롬(shalom: 평화)을 경험한다.
 
범죄의 본질은 그것이 샬롬을 깨뜨려 올바른 관계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데 있다. 성경적 관점에서 범죄는 치유가 필요한 상처다. 그렇기 때문에 일을 바로잡는 배상이 성경에 자주 등장한다. 사실, 일을 바로잡는다(making things right)는 말은 샬롬이라는 말의 뿌리다.
 
성경에서 회복은 정의의 궁극적 목표였지만, 신의 백성들이 그 가능성에 늘 열려 있었던 건 아니다. 조지아에 있는 코이노니아(Koinonia) 공동체의 클라렌스 조던은 성경에 이 문제에 대한 이해의 전개, 즉 일종의 진보가 있다고 지적했다.
 
창세기는 잘못에 대한 무한한 보복이 정상적 반응이라는 인식에서 시작한다. 이를 ‘라멕(Lamech)의 법칙’이라고 부르는데, 창세기에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창 4:24)으로 아주 자세하게 묘사된다. 거의 끝이 없는 응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복수는 곧 제한된다. 신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눈에는 눈으로만 갚으라고 말한다(출 21:22).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이 구절은 복수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복수에 대한 제한을 의도한 것이다. “그만큼 하되, 오직 그만큼만 하라.”
 
그다음에 보복에 대한 또 다른 제한이 있다. “너희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복수하거나 원한을 품지 말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레 19:18).
 
그리스도는 이러한 방향으로 계속 나아간다. “네 이웃뿐 아니라 원수도 사랑하라, 너를 해치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라.” 무한한 보복이나 제한적 보복 대신 무한한 사랑을 요구하며(마 5:38-48),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마 18:22) 아주 자세하게 말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두 번째로, 구약의 정의에 대한 중요한 단서는 잘못에 대응하는 신의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죄에 직면했을 때, 신은 열기와 거친 호흡을 나타내는 단어와 함께 노여움으로 가득 찬 분노로 묘사되며, 범죄 피해자처럼 화가 난 것으로 이해된다(예: 창 6:6).
 
그러나 실제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로 인한 분노에도 불구하고 신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은 잘못 앞에서 분노를 드러내지만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창세기 8장 21절에서처럼 신은 노여움을 통해 회복으로 나아간다. 응보가 아닌 회복이 성경적 정의의 핵심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응보보다 용서, 회복, 화해에 초점을 맞춘 것은 상당히 논리적이며, 구약성경의 전체적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다.
 
정의는 관계의 회복을 의미한다
 
범죄를 샬롬에 대한 침해로 보는 성경적 관점은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것에 좀 더 가깝게 범죄를 바라보는 방식을 제시한다. 범죄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침해다. 그러므로 정의는 무엇보다 먼저 관계를 회복하고 바로잡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 범죄와 정의에 대한 또 다른 이해는 다음과 같다.
 
범죄는 사람에 대한 침해다.
정의는 욕구와 의무를 식별한다...
일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대화를 장려하고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가 참여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정의에 대한 회복적 접근은 범죄의 본질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에 대한 침해로 이해한다. 먼저 “누가 가해를 했는가? 어떤 처벌을 받아야 하는가?”(이것을 넘어서는 경우는 거의 없다)라고 묻는 대신, 정의에 대한 회복적 접근은 “누가 피해를 입었는가? 일을 바로잡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누구의 책임인가?”라고 묻는다. 진정한 정의는 응보보다는 회복, 화해, 책임을 그 목표로 삼을 것이다.
 
회복적 정의는 개인적 정의를 지향한다. 가능한 한 피해자와 가해자가 자신들의 사건에 관여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고, 그 과정에서 서로에 대해 배울 수 있도록 노력한다. 미국과 캐나다의 많은 공동체 사회에서 운영되는 피해자-가해자 화해 프로그램(VORP)에서와 같이, 상황이 허락하는 한 정의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만나 정보를 교환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중요한 목표는 피해자와 가해자 간의 이해, 책임 수용, 상처의 치유, 참여자에게 힘을 실어주기 등이다.
 
회복적 접근은 실용적인가? 정말로 효과가 있는가? VORP의 경험에 따르면 한계와 함정이 있긴 하지만, 일부 어려움이 있는 경우에도 회복과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우리의 역사도 이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서양사에서 대부분의 범죄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가한 피해로 이해되었다. 그러한 잘못은 바로잡아야 할 의무를 낳았고, 정상적인 절차는 일종의 배상 합의를 협상하는 것이었다. 지난 몇 세기 동안만이 현재의 응보적 이해가 이러한 회복적 접근 방식을 대체하게 되었다.
 
우리 조상들이 범죄와 정의를 그런 식으로 볼 수 있었다면, 우리는 왜 그럴 수 없겠는가?
 
 
참고문헌
 
하워드 제어, 2006. The Little Book of Restorative Justice. (회복적 정의 실현을 위한 사법의 이념과 실천, 2017, 대장간) Intercourse, PA: Good Books.
 
© Howard Zehr, "Goshen College Bulletin"에 처음 게재됨, 1990년 3월. 허가를 받아 사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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