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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2부 보트머 체조 (3) 본문

발도르프교육학/발도르프 체육교육+놀이

2부 보트머 체조 (3)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4. 4. 11. 23:01

프리츠 그라프 폰 보트머(Fritz Graf von Bothmer)의 발자취,

그리고 보트머 체조

 

 

1차 세계대전 후 프리드리히 막시밀리안 에드와르트 그라프 폰 보트머(Friedrich Maximilan Eduard Graf v. Bothmer)는 삶의 새로운 의미를 찾는 상황을 맞이하였다. 수백 년 동안 바이에른 왕족을 위해 봉사하는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이미 요람에서부터 군인의 길을 걸어가도록 정해져 있었다. 다른 길을 선택할 기회가 없이 집안의 전통에 따라야 했다.

 

18831221, 뮌헨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난 프리츠(*보트머의 이름)는 라틴어학교를 마치고 12살의 나이로 뮌헨의 궁중학교(Pagerie, *왕가를 위해 봉사하게 될 아이들을 육성하는 궁중학교 또는 기초군사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이 궁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그의 가족은 어려운 시기를 겪게 된다. 프리츠의 아버지, 모리츠 오토 그라프 폰 보트머(Moritz Otto Graf von Bothmer)가 네 명의 어린 아이들을 남겨두고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 군장교인 아버지의 빠듯한 봉급으로 생계로 꾸려나갔는데, - 이제 미망인 연금만으로 아이들을 키워야 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다.

 

이 시기에 프리츠는 궁중학교 입학시험에서 떨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힘든 가정형편이 고려되어 다시 입학기회를 얻게 된다. (궁중학교는 중세 비잔틴 궁중양식에 따라 세워진 학교이며, 7세에서 14세까지의 남자아이를 대상으로 궁중에서 봉사하게 될 귀족 자제(*낮은 지위를 가지는 귀족)를 양성하는 곳이다. 뮌헨의 이 궁중학교는 1514년에 세워져, 마지막 궁중학교의 형태로 남아 있었던 곳 중에 한 곳이었는데, 이 학교도 결국 1918년 문을 닫게 된다.) 그가 입학한 빌헬름 김나지움의 교육방식은 인문주의적 방식이었다. 이때 배운 4가지 외국어, 즉 영어, 프랑스어, 라틴어, 그리스어는 평생 동안 그의 커다란 지적자산이 되었다.

 

궁중학교에서 아이들은 기초군사교육를 받게 되는데, 승마, 펜싱(검술), 수영, 댄스, 스키 외에 왕가를 위해 봉사할 젊은 장교로서 필요한 모든 것을 포괄하는 교육이었다. 그리고 집중적으로 예술교육을 받게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궁중여행’(*예술작품 견학을 위한 여행)을 하면서 매년 유럽의 중요한 박물관을 견학할 기회를 가지게 된다. 여행마다 아이들은 정서체로 견학일지를 써야했다. 이러한 체험은 어린 프리츠에게 예술에 대한 사랑과 이해를 일찍 깨우치게 해주었다. 이때 받은 폭넓고 집중적인 교육이 나중에 그가 쌓게 되는 업적의 중요한 토대가 된다.

 

20세기 초, 젊은 보트머는 학업적·군사적 교육을 마치면서, 이제 장교로서 드디어 자신이 관심 있던 분야를 추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칸딘스키(Kandinsky)와 뮌터(Gabriele Muenther)를 비롯한 미술가 집단과 친분을 가지게 되었고, 그곳에서 그는 안식을 얻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는 평생을 이어가게 되는 벗인 막스 볼프휘겔(Max Wolfhuegel)과 한스 스트라우스(Hanns Strauss)를 만나게 된다. 이 두 벗은 나중에 슈투트가르트 발도르프학교의 동료교사로서 다시 만나게 된다.

 

20세기 초부터 보트머는 루돌프 슈타이너를 만날 기회를 가졌었다. 보트머의 어머니는 몇 차례 슈타이너의 강의에 그를 동행하였고, 보트머는 즉각 슈타이너의 인격과 강의에 강한 인상을 받게 된다. 그곳에서 평소에 가졌던 깊은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찾게 된다. 이후 그는 신지학협회(*인지학협회가 생기 전의 협회)에 가입하고 규칙적으로 슈타이너의 강의를 듣게 된다. 이로써 점점 이 두 사람은 친분을 맺게 된다.

 

이 시기에 있었던 중요한 세 번째 만남은 아내가 될, 힐데가르트 탄(Hildegard v. d. Tann)과의 만남이었다. 그녀는 보트머처럼 전통적 귀족집안 출신이었다. 그들은 1913년 결혼하였다.

 

보트머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바로 전선에 나가게 된다. 하지만 곧 가까스로 죽음만을 면하는 심한 부상을 입는다. 1919년 전쟁 종료 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 폭력, 굶주림, 기아 등의 - 혼란이 어느 정도 가라앉으면서, 보트머 역시 새롭게 자신의 직업에 대한 질문을 생각하게 된다. 이때 보트머는 35세였다. 그는 4명의 아이를 두고 있었고, 그의 부인과 함께 아이들을 위한 길을 찾게 된다. 뮌헨에서의 삶은 - 물론 그 당시 다른 대부분 독일의 도시들처럼 - 위험으로 가득 차 있었다. 길가에는 총질과 도둑질, 폭동이 끊이지 않았다.

 

처음에 보트머는 군에 계속 남아서 참혹한 나라의 현실을 위해 민주주의가 들어설 수 있도록 도움이 되고자 하였다. 그는 도처에서 벌어지는 스파르타쿠스단(독일의 폭력적 혁명단체)과 공산주의 단체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사회적인 위기상황을 곳곳에서 목격하게 된다.

 

오래전부터 품고 있던 교육활동에 대한 바람은 점점 더 커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헤르만 리츠(hermann Lietz)가 설립한 란드슐하임(Landschulheim *시골지역의 교육관)을 방문하여 강한 인상을 받고, 교사 면접을 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친구 막스 볼프휘겔을 찾아 그곳에서 1919년 설립된 첫 번째 발도르프 학교의 수업도 체험하게 된다. 그가 방문한 두 학교간의 차이를 보트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란드슐하임은 교사들에게서 헌신과 유능함을, 아이들에게서 진지한 공부에 대한 태도, 예의와 순종을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과 경건함이 가득 찬 곳이었다. 하지만 이처럼 새롭고 신선함에도 불구하고 무언가가 아이들에게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는 세상에 대한 강한 믿음, 아이다움의 숨결, 순수함 같은 참교육을 통해 아이들이 얻어야만 하는 그러한 것이 빠져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이유가 그곳의 수업이 종교와 - 특정 종파적 신앙은 물론 자유 신앙과도-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이 들었다. 안타깝게도 아이들의 영혼에 정신적인 것이 다가가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이어서 보트머는 발도르프학교를 방문하고 난 소감을 다음과 같이 썼다. “린다우(Lindau)로 돌아가는 길에 ... 나는 막스 볼프휘겔의 작업장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란드슐하임에서 가졌던 의문의 답을 바로 찾게 되었다. 이곳에선 정신이 살아 있고, 정신적인 것이 아이들을 향해, 아이들 안에서 살아 숨쉬면서 활동하고 있었으며 ....”

 

하지만 그가 슈투트가르트의 발도르프학교에서 교사로서의 길을 가기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더 걸리게 된다. 보트머는 슈타이너에게 조언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을 부탁하였고, 오랜 시간이 흘러 뮌헨에서 만남의 시간을 갖는다. 이곳에서 슈타이너는 보트머에게 발도르프 학교의 체조수업(체육)을 맡을 수 있는지 묻는다. 이 질문은 보트머에게 삶의 중요한 갈림길에 서게 하는 것이었다.

 

보트머는 이 제안을 수락하였고, 19229월부터 슈투트가르트에서 - 이때 발도르프학교의 체육관은 아직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어려운 조건이었다 - 수업을 하게 된다. 날씨가 허락하는 한 야외에서 수업을 할 수 있었지만, 겨울에는 수업이 전혀 이루어질 수 없었다. 보트머는 이 시간을 다른 교사들의 수업을 참관하는 기회로 삼는다.

 

이윽고 체육관이 완공되고, 이때부터 보트머는 본격적으로 수업을 하게 된다. 1922년부터 1938년까지 발도르프학교에서 그는 - 나중에 자신의 이름을 딴 - 체조를 발달시킨다. 보트머 체조는 단지 머리에서 나온 관념적인 이론이 아니라, 보트머의 특별한 능력을 통해, 아이들의 연령에 적합하게 발달시킨 실제적인 동작교육(움직임)이다.

 

보트머가 동료들과 나눈 일화에서 보트머의 움직임에 대한 태도와 가치를 느낄 수 있다. “000 선생님, 당신은 항상 좋은 아이디어들을 떠올리는 것 같습니다. 내 경우에는 그러한 것들이 제스처(동작)로 떠오른답니다.” 그리고 그는 동료교사에게 한 동작을 보여주면서 다음의 말을 한다. “이것은 피라미드에서 나와서 정신세계로 돌아가는 영혼의 움직임을 표현한 것입니다. ... 저에겐 수업 전에 이러한 순간을 가지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수업을 위해 아이들 앞에 서기 위해서는, 저 자신이 어떤 능력이 많거나 재주가 많은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내 안으로 세상의 정신적인 흐름의 힘을 받아들 수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 정신세계에서 아이들을 통해 저에게 흐르는 어떤 흐름, 그 미지의 힘을 느끼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저명한 김나지움 교사이자, 괴테학자, 자연과학자인 킾박사는(1908-1997, Dr. Friedrich Alexander Kipp) 그 당시 19229, 발도르프 학교의 8학년생이었다. 킾박사에 의하면, 보트머는 첫 번째 체육시간에 아이들을 대오를 지어 정렬시키고, 마치 병영훈련소처럼 행진을 시켰는데 아이들은 뭘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아이들은 다음 수업시간에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요소를 체험하게 되었다. 실제적이고 살아 있는 공간과의 관계를 얻을 수 있는 연습들이었고, 일생동안 갖게 되는 강한 인상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보트머와 함께한 연습을 통해 인간은 공간 안에서 자기 스스로 성장해 나가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다고 한다. 킾박사에 따르면, 보트머는 슈타이너의 교육적 제안 또는 도움 없이 스스로, 무에서 완전히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만 했던 얼마 되지 않는 발도르프 교사 중의 한 명이었다고 한다.

 

19383, 나치스에 의해 학교가 폐쇄되기 직전까지 보트머-체조는 수많은 유럽 도시들에 소개되었으며, 체조(체육)교사 양성기관도 세워졌다. 그의 저서 체조 교육 Gymnastische Erziehung’은 그가 눈을 감기 바로 전에야 완성될 수 있었다. 나치의 비밀경찰의 감시망 아래에서 정말로 보트머가 쓰기를 원했던 글을 쓰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나온 책이었다.

보트머는 이 책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타자기에 다시 글을 쓰게 될 때가 온다면, 이 책은 바로 완전히 개정된 두 번째 판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지금 내놓는 첫 번째 판은 고기와 뼈에 침 흘리는 사나운 짐승들에게 던지는 것이다. 사자들이 감미로운 초콜릿을 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래서 이 책의 또 다른 판은 미식가를 위해 바치고자 한다. 높이, 멀리, 넓게는 단순한 방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의 질을 의미하는 것을 아는 이들에게, 그리고 전환은 단지 방향을 바꾸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메타노에이테(metanoeite *그리스어, 참회하라, 회개하라), 삶의 의미를 회개하라!’는 것을 아는 이들에게, 그리고 방향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 바치고자 한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도덕적 세계질서 안에 살고 있고, 체조 역시 도덕적인 영역에 들어가야 한다고 믿는 보트머에겐 그 당시에 체조에 관한 책을 쓰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간(anthropos)이라는 말, 바로 서 있는 이라는 말 그 자체에 이미 도덕적 세계상이 들어있지 않은가! 그 당시는 인지학 회원들 중 일부가 나치의 강제수용소에 수용되기도 하고, 나치에 의한 감시·통제가 심한 상황이었다.

 

1941년 보트머는 가슴과 등 부위에 있던 고질적 문제의 원인을 드디어 알게 된다. 그러나 치료를 받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후였다. 프리츠 그라프 폰 보트머는 1941913일 잘츠부르크의 한 전문클리닉에서 폐암으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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