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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디테르 쿠스 선생님의 역사교육 강의 (2) 본문

발도르프교육학/발도르프 역사교육

디테르 쿠스 선생님의 역사교육 강의 (2)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1. 9. 4. 00:35

두 번째 교사회 세미나 - 2011105일 수요일

 

 

안녕하세요. 좋은 오후입니다. 어제보다 수가 적은데, 시작하면 더 오시겠죠? 아니면 어제 너무 피곤하셨나요? (웃음) 여러분 인원이 적으니 더 작게 세미나를 진행하면 되겠죠? 지난 시간 뒷부분에 이어서 세미나를 이어가겠습니다. 다른 날에는 아마도 역사 수업이 아닌 다른 테마를 다루어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은 질의응답을 통해서 진행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

어제 제가 수업을 하고 난 후 가진 느낌은, 저는 어쨌든 유럽의 관점에서 진행된 역사적 내용과 상황을 설명드렸는데, 여러분들이 동양권에서 가져야 하는 관점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느꼈습니다. 오늘날 세계의 발도르프학교는 여러 곳에 많이 퍼져나갔는데, 서로가 궁금한 것은 각각 나라의 환경, 문화, 지리적인 차이에서 어떻게 역사 수업이 진행되는지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인간적인 상황에서 동질적인 면은 어디이고, 이질적인 면은 어디인가입니다. 이러한 질문은 어린이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어린이들도 각각의 상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저 자신에게도 중요한 것은 아이들과 청소년의 상황과 조건, 상태, 특수성의 이해 - 관찰을 통해서 배워야 되는 부분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어제 이야기했던 의식혼의 시대에 이어서 진행을 해 보겠습니다.

 

[그림1]

이 그림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시겠습니까? (계속 어제 마지막 그림을 완성해 가신다.) 그림에서 표현된 화살표는 내적이고 고독한 명상적인 부분으로 정신세계와 단절된 부분을 뚫기 위한 중요한 긴장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신지학에서는 마나스라고 부릅니다. 하나의 숨겨진 일화라고 볼 수 있는데,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고 진실 여부를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슈타이너가 이야기했던 말입니다. “하루에 5분 명상하는 것이, 1시간 수업 준비하는 것보다 나을 수 있습니다.” 이미 명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책과 강론에서 중요시한 적이 있는데, 하루에 5분이라도 명상을 하면 매우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일화는 그럴 것이라고 유력하게 볼 뿐입니다. 그러니까 수업준비 하지마라는 말은 아닌 것입니다. (웃음)

이것은 하나의 예시일 수 있습니다. 즉 우리의 이해의 힘보다는 명상을 통한 정신적인 힘이 상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명상이라는 것은 오히려 아시아 쪽 사람들이 익숙할 수 있습니다. 즉 저보다 한국 선생님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유럽을 포함한 서양의 사람들은, 어디선가 명상을 하는 전통이 있었겠지만, 오랜 시간동안 단절되고 사라진 상황입니다. 그런데 5분 정도의 명상을 통해서 곧바로 효과를 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1달 정도 지속을 하다보면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독일말로 좋은 표현이 있는데, ‘정신이 현실(현재)화 됩니다.’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현재에 표착된 순간에 대한 집중을 이야기합니다.

영국에서 말하는 영어식의 표현이 있습니다. “인식의 문이 열리면 사물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다.” 이 표현은 교사로서 조그마한 말이지만, 어린이들과 만나는 상황에서 중요한 말일 것입니다. 우리들이 아이들을 관찰하고 집중하는 그 순간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이럴 때에는 준비한 어떤 형식이나 개념을 옆에 놔두고, 그 순간에 만나는 일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마나스라고 명명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것이고, 우리 삶에 가장 중요한 능력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역사 수업이든, 문학수업, 국어수업이든 간에, 수업 자료는 하나의 운송수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수업 자료로서의 운송수단은 어느 순간 없애버려야 합니다. 악기로 예를 든다면, 무대에 올라와있는 플롯은 관이고, 바이올린은 울리는 몸체가 있지만, 재료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재료를 통해서 울리는 소리인 것입니다.

 

[그림2]

어제 보았던 전체적인 조망을 그림을 통해서 훑어보겠습니다. 어제 우리가 조망했던 역사적인 발달과정, 의식형성의 과정은 그림처럼 하강하고 상승하는 운동의 곡선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질문을 드린다면, 하강했다가 상승하는 가장 아래의 꼭지점은 어느 시대에 해당할까요? 가장 아래에 있는 꼭지점은 오히려 가장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습니다. 즉 이 표는 수학적인 도표(시간 변화에 따른 변화)는 아닙니다.

가장 아래의 지점에 놓인 학년들은 8학년과 9학년이라 볼 수 있습니다. 가장 깊이 내려가 있는 지점은 부정적이고 어두운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가장 무거운 지점인 것은 확실합니다. 조금 긍정적인 표현을 하자면, 이 시대의 아이들은 자신의 신체와 정신이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지점은 현재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의 청소년은 하나의 성육(하늘과 땅이 일치됨)의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물질적인 것은 현재 이 순간(8, 9학년)이라는 속성과 같습니다. 그래서 어제 했던 이야기를 반복하면서 이 지점으로 오는 것은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8, 9학년 아이들은 현재의 지점에 왔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어제 이야기 했듯이 5학년은 고대 문화의 시점’, 6학년은 훈련 - 규율(로마 이야기 하면서)의 시점’, 7학년의 테마는 발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강해서 8학년까지 오는 것은 담임과정의 역사, 그 이후의 상승 과정은 상급과정의 역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발도르프학교의 상급에서 제시된 역사 수업 과정은 슈타이너가 직접 이야기한 것과 일치하는지, 또는 첫 번째 발도르프학교 역사교사가 개발했는지 알 수 없지만, 공통적인 것은 담임과정의 내용이 상급과정에 반복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10학년에서는 5학년에서 공부한 내용들이 다시 한 번 반복됩니다. 5학년 때 내용과 10학년 때 내용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서는 다른 시간에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어쨌든 10학년에서는 고대 문화를 다루게 되고, 11학년에서는 진도에 맞게 6학년 때 배웠던 내용을, 12학년에서는 좀 더 광범위하게 7, 8학년 때 다루었던 내용을 좀 더 심화하면서 마무리를 합니다. 역사 교사로서 상급과정에 가서 다시금 진도를 시작할 때, 상당한 불안감과 어려움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이미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학생들은 자신의 기억력을 전부 동원해서, 교사가 수업하고자 하는 내용을 이미 알고 있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면서 학생들은 역사시간을 가볍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상급의 역사교사는 뱀처럼 영리해야 합니다. 영리해야한다는 부분을 유럽에서는 뱀이라고 표현합니다. 한국에서는 여우라고 표현했는데, 저는 여우는 다른 차원의 영리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우처럼이든, 뱀처럼이든 상관없이 영리함을 발휘해서 5학년 때 이미 배운 아이들의 상황을 잘 이용해야 합니다.

이미 배운 아이들은 교사가 하고자 하는 의도에 대해서 비평을 하고자 하는데, 그것을 옆으로 제치고 다른 의도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교사가 설명하기보다는 5학년 때 배웠던 내용을 가지고 와서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10학년 학생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왜 그런 문화가 오늘날까지 이어져왔고 형성되어왔는가?”입니다. 이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 같습니다. 10학년은 계속 질문합니다. “왜 나는 이 모습인가? 나는 왜 현재 지금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왜 이 문화권에 있는가?”

나의 아버지는 왜 그분이고, 나의 어머니는 왜 그분인가?” 이 질문은 무엇과 연결이 되냐면, 왜 나는 지금의 모습과 다르지 않는지에 대한 이면의 생각이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생각들이 확대되면서, 나의 가족, 나의 친지, 나의 나라, 나의 민족으로 점점 넓어져갑니다. 저 자신도 예전을 돌이켜보면, 왜 나는 독일에서 태어났는지에 대해서 고민을 가졌던 과거가 생각납니다. 당시 독일의 젊은이들은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독일인에 대한 가치를 두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국가사회주의로 인해 나타나는 독일의 부정적인 나치의 모습을 젊은 사람들에게 보여줬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은 스스로 자긍심을 갖지 못했습니다. 당시의 대부분 독일인들은 자기 나라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했고, 외국에서도 독일인들이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꼈습니다.

저도 경험이 있는데, 스웨덴에 갈 일이 있어서 식당에 앉아있었는데, 대화를 하면서 독일인이라고 드러나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외국어를 많이 배워야겠다고 동기부여가 되기도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독일인이라고 느끼지 못하도록 제 형제 중에 한 명과 암묵적으로 외국에서 프랑스어로 대화를 하자고 약속을 했습니다. 하지만 외국사람들은 우리의 억양 때문에 우리가 독일인이라고 느꼈습니다. (웃음)

저의 청년 시절에는 이러한 경험으로 인해서, 독일인으로서의 자긍심은 없고 독일로부터 멀어지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최소한의 왜 내가 독일인이고, 독일에서 태어날 수밖에 없어나?”이러한 질문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10학년의 하이마트고향이라는 뜻인데, 10학년 때 이러한 질문을 대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독일에서 고향이라는 표현은 상당히 감상적인 표현입니다. 이 단어의 배경에는 고향에 대한 향수가 들어있습니다. 이렇듯이 10학년 아이에게도 왜 내가 땅이 내려와야 하는가? 내가 지상으로 내려와야 하는가?”라는 것들이 이면의 배경이 되어서, 저런 질문들이 드러납니다.

9학년은 현재에 있다는 시대이고, 10학년은 그것에 대해서 반추하면서 라는 질문을 하게 되는 시대인 것입니다. 그래서 10학년 역사수업은 현재적인 상황의 설명이나 설정이 아닌, 고대의 상황에서 위에 이야기 했던 배경이 되는 질문들에 대한 답을 얻어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슈타이너는 아이들은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대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농경사회에서 정착하기 시작하는데, 그 안에서 고향이라는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향에 대한 느낌, 정착감, 안정감들은 인류에 대해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데, 아주 수천 년 전에는 유목생활을 하면서 정착하지 않은 떠돌이였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서부터, 정착하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상당히 드라마틱한 변화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에게 정착이라는 것을 가져다주었나? 정착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어떤 지리적인 상황이었는가?”라는 질문을 해볼 수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여러 곳의 정착할 수 있는 환경이 있었는데, 어떤 요소가 정착을 가져다 주었는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나 마야문명, 황하문명의 발생지역의 여러 곳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10학년 학생들과 지리적인 요건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인류가 정착을 했다면 그것으로 인해서 얻는 효과는 무엇이었는가? 그러면서 그 부족들에게는 항상 질문이 있었습니다. “유목하고자 하는 요인과 정착하고자 하는 요인에서 무엇이 더 강한가?”라는 질문을 부족들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분석과정을 통해서 10학년 아이들은 의식적으로 처음에 질문했던 고향에 대한 답을 찾아가고 얻게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떤 지점이 나에게 영향을 주는지 학생들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10학년들은 고대 문화를 되돌아보면서 인간에게 어떤 점이 사회로 하여금 움직이게 하고, 떠나게 하는지, 어떤 요소가 정착하게 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 수 있습니다.

11학년에서도 비슷한 테마를 다루어보게 되겠지만, 다른 요소는 규율이냐, 혼란이냐?’라는 2가지의 대비된 상황을 겪어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리스의 상징적인 두 신을 볼 수 있습니다. [아폴로와 디오니소스]입니다. 아폴로는 온전함, 정돈의 상징이고, 디오니소스는 슬픔, 포도주, 도취적의 상징(속박되지 않는 것)입니다. 많은 문화적인 흐름과 영향이 유럽에 흘러 들어왔습니다. 로마의 문화는 법치, 규칙, 법률을 나타내는데 그것이 어둡고, 죽어있고, 생동감 없는 문화라고 볼 수 없습니다. 로마의 문화는 켈트족에 대비되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로마의 문화는 아폴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로마의 문화적인 성향이 다른 문화들과 함께 유럽 안에서 서로 부딪혀왔다. 그래서 로마의 문화적인 특성과 다른 문화적인 특성이 서로 충돌하면서 중세 시대는 흘러갔습니다. 11학년 학생들이 느끼기로, 이러한 성향이 10학년 수업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한 단계 위로 상승하는 테마입니다. 지리적인 비교나 대비가 아니라, 감성적인 차원(아스트랄)의 비교나 대비를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11학년 시기의 아이들에게는 이러한 정신적이고 영혼적인 관심과 움직임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야기는 자신의 고향이나 가족, 친지, 부모와 어느 정도는 독립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학생들의 상황과 관계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질문을 해보자.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보통의 문화에서는 아폴로적인 성향의 문화가 작용을 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옆에 있는 컴퓨터 같은 것들도 아폴로적인 차원의 명확하고, 정확하고, 잘 자리 잡고, 규격화되어 있는 성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아이들이 손으로 쓰는 것은 디오니소스적인 성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한글 자체가 아폴로적이라고 느꼈답니다.

여기서 질문해볼 것은 - 규율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법적인 상황에서 본다면, 어느 부분은 상당히 명확한 상황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법칙은 서로에게 통용되듯이 존재하고, 거의 모든 것에 대한 법규가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것을 관장하는 곳에서 규칙화 되어있지 않은 것이 발견되면 바로 규칙화를 해 버립니다. EU에서는 항상 규격을 정하는데, 종이의 규격, 포장 용기의 두께 같은 것까지 아주 정확하게 규정화를 합니다. 치츠는 얼마 동안 보관되고, 어디서 보관되어야 하는지도 규정화합니다. 또한 보관자체도 높이나 무게가 규격화가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진행해서 질병이 발병하지 않다면 좋을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것은, 프랑스 사람이 좋은 치즈를 만들어내는데, 웬만한 치즈가 아니면 규격이 맞지 않아서 판매가 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안 좋은 결과가 나옵니다. 바로 모든 치즈가 똑같은 맛을 내는 규격화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EU의 규격화는 똑같은 제품만을 만들어 내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치즈 같은 경우는 나쁜 상황이 아닙니다. 하지만 종자 같은 경우는 상당히 어렵고 부정적인 상황이 발생합니다. 이렇게 검사하고 감독하는 것은 항상 안 좋은 쪽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청소년들도 이러한 내용을 배우면서 이 사회가 규격화 - 구조화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질문을 하게 됩니다. “내가 이런 식으로 살아야 되나?” 청소년들은 규율에 대한 타고난 면역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들은 디오니소스적인 측면에 있습니다. 당연히 다른 측면 성향이 있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즉 컴퓨터에 매달리고 미디어에 빠져 있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스피커에 노래를 크게 틀고 듣는 아이들 - 부모가 귀 상한다고 이야기를 해도 상관없는 - 그래서 아폴로적인 성향이 지시하고, 지적하는 것에 대해서 청소년들은 관심이 없습니다. 청소년들은 디오니소스적인 측면에서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것은 약물이나 담배 같은 중독에 대한 부분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소년의 권위적인 측면이 보호가 되어야합니다. 현실에서 아폴로의 법칙이나 규율이 강화될수록, 청소년의 범죄나 중독에 빠져드는 것 또한 강화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법이나 규칙이 많이 생길수록, 그곳에서 벗어나고 자유롭고 싶어하는 것 또한 생겨나는 것입니다. 세상이 너무 만들어져서 주어지면, 아이들 스스로 그것을 극복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집니다. 말씀드렸듯이, 모든 것이 잘 짜여지고 만들어지고 조성되어서 제공 되어지는 것은, 청소년들에게 오히려 자유롭지 못하고 편안하지 못하고 속박처럼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필요해서 만들고, 정리해서 규율화하고 했지만, 나중에는 모든 것이 이미 만들어져서 주어졌기 때문에, 지금의 나에게는 그것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껴지는 것입니다.

다시 로마의 상황으로 가봅시다. 로마에서는 규율, 규칙, 규범으로 기준을 정하였습니다. 로마에서는 법에 따라서 모든 사람이 권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렇지만 게르만족에게는 다른 법칙(감정의 법칙)이 작용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군중들이 모여서, 잘못한 사람을 앞에다가 세우고 그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되냐고 물어봅니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이미 정해진 규칙이나 규정은 없습니다. 최상의 경우라고 한다면, 그 사람이 각각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판단하게 하는 것이겠지만, 개인마다 느끼는 감정은 다양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로마는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정당에서 보면 가장 큰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유리하고 이긴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성향이 여러분에게 더욱 어울립니까?

로마나라의 성향이 우리에게 더 어울릴까요? 그렇지만 청소년에게는 게르만족 사람들의 마음으로 느껴지는 규칙이 더욱 어필이 되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그러면 아폴로와 디오니소스 양쪽의 성향을 몇%씩 내가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안에서 균형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모두에게 질문을 해볼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서는 2가지의 특성이 동시에 있고, 2가지 특성 모두를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많은 어려움과 불행한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른이 되기 전에 학생들이 스스로에게 마음의 움직임, 영혼의 움직임을 견주어 보고, 균형을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마지막 학년인 12학년은, 많이 성숙했다고 말할 수 있고, 다른 면에서는 왕으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아주 현대적인 용어인데, 12학년은 세계화, 우주화시대입니다. 이 시대는 각기 다른 문화가 도처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에 대해서 슈타이너는 제안했는데, 하나의 관점으로 가능하면 모든 것을 관찰해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다양한 문화가 있는데, ‘죽음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각각의 문화에서 어떻게 바라보고 대하는지에 대해서 알아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어린이들을 교육하는지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12학년의 학생들에게는 이 주제가 매우 좋습니다. 왜냐하면 학교에 학생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는 각 나라의 사람들은 이동을 할 때 어떤 이동수단을 이용하는지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어떤 도구를 사용해서 무엇을 먹는지에 대해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많은 나라의 문화와 상황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또는 담을 어떻게 건축을 하는지, 집을 어떻게 짓는지에 대해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건축가를 초빙해서, 또는 견학을 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조그마한 학교 정원에 모형 건물을 지어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많은 것을 보기 위해 아주 높은 곳에 올라가듯이, 많은 영역을 두루 보면서 이 세상을 조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12학년의 목표입니다. 그러면서 방법론적으로 교사가 모두 준비해서 진행하기 보다는 개인프로젝트 형식의 수업이 더욱 어울릴 것입니다.

이렇게 12학년까지 가면 우리는 교사가 학생들을 이끌지 못한다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히려 적합한 질문을 하는 교사, 어떤 방향성을 제시해주는 교사가 진정으로 맞다고 알게됩니다.

이어지는 시간에는 질문을 모아보고, 질의응답 안에서 이야기를 보충하거나 질문에 대답을 곧바로 하겠습니다.

 

Q) 상급에서 역사철학 측면을 도입하고 싶습니다. 역사는 무엇이고, 왜 하는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이러한 내용이 발도르프학교 상급과정의 교육과정에 들어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 역사철학은 아주 높은 경지의 영역이라 12학년 가서 비로써 다룰 수 있을 것입니다. 20여년 동안 아이들을 관찰해본 결과, 점점 철학적인 주제나 과제에 대해서 관심이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역사 주제 안에는 철학적인 주제와 관점이 들어가 있고, 우리가 생각하는 철학적인 주제를 연결해서 엮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철학적이지 않은 것처럼 아이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만 한국의 청소년은 다를 수 있습니다. 소위 68학생 운동 세대(쿠스 선생님 세대)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철학 서적에 대해서 판독을 하고, 다양한 철학가들에 대해서 토론하였습니다. 그 반면에 다음에 오는 세대(20대의 사람들)는 반대의 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철학적인 부분에 대해서 전혀 관계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25살이 된 제자가 있는데, 그 사람이 저에게 제안을 하기는, “당신 세대는 정말 많은 것을 생각했는데, 실천은 매우 조금밖에 하지 않았어요.”라고 이야기를 했단다. 역사적으로 무엇인가는 바꾸기는 했지만, 그 결과가 꼭 좋지만은 않았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나치즘이라는 것은 이 사회를 변화시키기는 했지만, 부정적인 영향이 많은 것입니다. “그냥 당신들의 생각에 맞기겠습니다. 철학이 세상을 좋게 하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반응하는 젊은 사람들의 세대는 많이 치우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전의 철학만을 중요시했던 사람들도 한쪽으로 많이 치우쳐져 있었던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행동을 더 많이, 나이 든 사람들은 생각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그것을 잘 결합시켜보자고 이야기를 해볼 수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철학적인 것을 조그맣게 만들어서 필요한 곳에 전달하는 방법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교실에 책을 전시해놓고, 아이들이 책에 관심이 생겨서 읽어보게 할 수도 있습니다. 저도 철학을 전공했지만, 지금의 분위기에 대해서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현실이 이러하기 때문에 그것에 맞춰서 대응해야 합니다. 지금 시대는 철학보다는 예술적인 작업에 집중하는 것이 더욱 어울릴 것 같습니다.

 

Q) 20여 년 동안 발도르프학교에서 상급 수업을 하셨다고 들었는데, 20년 전과 지금의 아이들은 다를 텐데 수업은 어떻게 변화를 주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 담임과정에 대해서는 예전에 했었고, 최근에는 수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엇인가가 바뀌어야한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상급과정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끔씩 4~5학년 아이들 수업에 대타로 들어갈 때가 있는데, 그 때 느낀 부분은 - 예전처럼 감성적으로 접근해서는 안되겠다고 느꼈습니다. 조금 더 직설적으로 아이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더 가까워지지 않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은 아주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수업하는 분위기와는 달라진 것 같습니다.

오늘날의 청소년들에게 느낀 변화는, 생각을 적게 한다는 것과 실습, 직접 행동, 의지의 작용이 많습니다라는 것을 느낍니다. 예를 들어서, 요즘의 상급과정 학생들은 숲을 보호하기 위해서, 어떤 대항을 하기 위해 숲에서 밤새 지키는 의지는 가졌지만, 그것과 관련하여 철학책을 읽지 않습니다. 숲 안에서 명상을 하거나 앉아있는 것은 할 수 있는데, 그 때 나무 밑에 앉아서 나무가 하는 소리를 듣거라!”하면 계속 앉아서 나무의 소리를 들으려고 합니다. 만약 제가 어렸을 때 이 질문을 받았다면, 그것은 미친 소리라고 하면서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오히려 관련된 논문을 주면 읽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20년 전과 지금 청소년들의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어렵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청소년의 변화인 의지의 체계를 통해서 아이들과 접촉해서 수업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비교가 되는 것은, ‘알고서 행하는 것과 행하면서 아는 것인데, 지금의 아이들은 행하면서 아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수업의 변화는 시간상 답변하기가 어렵습니다. 간단하게 답변을 하자면, 이미 6,7,8학년 아이들에 가서도 스스로 배우고 지식을 가져오고자 하는 성향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현상들은 아이들 스스로 하는 일을 하면서, 배우고 지식을 습득하는 일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염두에 두고, 이러한 변화가 지금의 시대를 말하고 있습니다.

 

Q) 말씀하신 아이들과 한국의 아이들이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을 합니다. 철학적인 부분에 대해서 아이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상급과정에서 본격적으로 철학수업을 한다고 하면, 어떠한 방법으로 진행하면 좋겠는가?

-> 질문을 접수하고 다음에 답변을 하는 것으로 하자. 이 테마는 여기서 이야기하기 보다는, 내일이나 모레 다시 이야기하기로 결정.

-> 긴 대답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짧은 대답을 한다면, 그런 아이들 경우는 텍스트를 가지고 하기 보다는 역할극을 가지고 진행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짧은 대답으로 결정.

 

역사 수업 진행한 내용에서 수정

-> 6학년과 11학년에서 수업을 할 때 주류를 이루는 것이 아폴로와 디오니소스인데, 이 두 흐름이 항상 대립을 하며 살았는데, 좀 전에 의사 결정하는 내용은, 어떤 사건이든 집회를 열어서 함께 결정을 하는 과정은 게르만족에 대한 부분이었고, 그 안에서 큰 목소리를 내는 사람 쪽으로 판결이 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로마인의 법적은 현재 법정처럼 규칙이 마련되어 있어, 그것을 판결을 하는 것입니다. 즉 아까 큰 목소리부분은 로마인에 대한 부분이 아니라 게르만족의 집회 의결 과정의 한 모습을 로마인이 보고 표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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